[2021] 숨 리뷰_플러스마이너스 1도씨(아르떼365)

꾸준한 정성으로 일구는 전환

 

시간을 남기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회고일지를 썼다. 벌어진 일, 오고 간 이야기, 짧은 감상을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적었다. 하지만 글이 쌓이고 보고 듣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마음에 밟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만난 이가 상처받을까 싶어 검열했고, 나의 좁은 생각이 들킬세라 정제했다. 우리 팀이 사랑받기를 바라며 미화했고, 그 속의 내가 못나 보일까 서둘러 타인의 언어를 차용했다. 기록을 올린 날이면 텅 빈 속을 까발리는 것 같았다. 글뿐만이 아니다. 함께하는 샘들 역시 포럼이나 컨설팅, 강의를 다녀오면 그렇게 술로 속을 달랜다. 그 속에 거짓이 있어서가 아니다. 십여 년의 노고가 몇 마디 말로 치환되는 것이 쓸쓸하고, 멋들어진 말들로 포장되는 것이 거북해서이다. 함께 해온 숱한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이 그저 내 입으로만 버무려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게 곱씹어 전한다 해도 언어가 되는 순간 비약은 필연처럼 동행한다. 그렇게 쌓인 비약은 ‘다음’이라는 문 앞에서 오래 묵힌 체증이 된다.

아르떼365의 기획연재를 진행 중인 단체 ‘궁리’로부터 <전환의 시대, 서울시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이하 숨)의 작년 활동을 기반으로 마을문화예술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나눠달라>는 원고의뢰를 받았다. 동북권역 마을배움터 ’숨‘은 청소년문화공동체 ‘품’이 공간 설계부터 참여하여 운영 중인 서울시1호 위탁 공간이다. 시공 기간만 일 년 반. 천여 명의 상상과 제안이 마을배움터를 오가는 동안 우리 팀도 초대받아 방문했었다. 당시에는 한창 공사 중이었던지라 어떤 모습으로 단장되었을지 궁금했고, 오랜만에 심한기 샘(품의 활동가(창립멤버)이자, 동북권역 마을배움터의 센터장)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선뜻 의뢰에 응했다. 마을배움터(품과 숨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야 품이 쌓아온 아카이빙이 어마무시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간 설계 과정부터 활동까지 3년의 세월은 꼼꼼하면서도 진솔하게 담겼고, 흐르는 언어는 위탁받기 전과 다름없이 대담했다. ‘저 정도로 솔직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그때의 고민이 거침없이 올라와 있었다. 품 나이 29살이었다. 투명한 기록 앞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공공의 아카이빙은 나의 기록에서 시작한다.>

“아카이빙의 본질이 뭘까?”

품은 활동 초부터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전달’에 집중했다. 전달은 보여주는 것이다. 읽는 이의 평가를 수반한다. 기획단계에서 오류가 생기고 진행 과정에서 감정이 오르내려도 그대로 적기란 쉽지 않다. 문장이 가공되는 만큼 글은 과장된다. 그러기를 이십여 년. 기록이 쌓일 만큼 쌓여서일까, 질문이 트기 시작했더랬다.

“나의 기록이 쌓여야 진짜 공유될 수 있는 공공의 아카이빙이 나오는 것 같아.”

나의 기록이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이 어렵고, 무엇을 희망하는지’ 정직하게 쓰는 글이다. 가치와 의미를 전달하기 전에, 자신을 마주하고 풀어내는 과정이다. 품은 사업기획안 하나를 쓰기 위해 일곱 번이 넘도록(몇 번이고) 자기 글을 쓰고 나눈다. 진행하기도 전에 지치지는 않을까 싶지만, 기획에 대한 자기 의심과 상상, 두려움과 설렘을 토로하다 보면 지구력과 애정도가 되레 상승한다고 말한다. 사업 하나에 들이는 공이 상당하기에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맡을 수도 없다. 경영평가를 받으면 낙제일 것이라는 심한기 샘의 웃음 뒤로 진심과 정성이라는 단어가 지나간다. 자신을 적어가는 시도는 사업기획과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품(숨)의 활동가들은 아침이면 SNS로 인사와 일과를 나누고, 퇴근할 때는 업무 일기를 공유한다. 한나절의 질문과 발견, 기분 등이 담긴 일기는 서로를 살피는 터가 된다. ‘주간 나눔’, ‘달 나눔’을 하는 시간도 있다. 이따금 수다만으로 해가 저물기도 하지만, 바쁜 업무 속에서 이 시간만큼은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서로를 살뜰하게 알아가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품(숨)에서는 활동가뿐 아니라, 참여하는 이들도 자기 기록을 남기고 나눈다. 물론 ‘말’이라는 효율적인 소통 수단이 있지만, 발화자와 수신자의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있어 이해하려는 마음은 곧잘 미끄러진다. 때론 실제보다 아름답거나 비참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글은 말 사이에 숨은 삶의 자잘한 소리, 침묵에 담긴 생각과 마음을 담아내는 옹기가 된다, 진심 어린 기록을 마주한 활동가가 감히 무엇을 미화하거나 미워할 수 있을까. 그저 ‘나는 어떠한가?’ 되물을 뿐이다. 품의 기록이 정직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하지만 심한기 샘의 말처럼 기록행위 자체에 집착하게 되면 본질을 놓칠 수도 있다. ‘나의 기록’이 정직하려면 ‘환대’가 필수적이다.

 

<기획 권력을 내려놓은 자리에 환대가 핀다.>

3년 전, 인류학자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이러한 환대를 해보겠다며 친구들과 자리를 연 적이 있다. 가을 햇살이 가득한 테라스에 식탁을 차렸고 따스한 차와 직접 달군 요리를 건넸다. 달콤한 노래와 포근한 말도 함께였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초대된 친구가 말했다. “이런 곳은 나에게 따뜻함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 불편해.” 간담이 서늘했다. 나 역시 사람들의 작은 사연, 얇은 목소리 한 줄이 기억나지 않았다. 환대가 연출될 때 장소는 연극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연출에 어울리는 태도와 격을 연기한다. 내가 준비한 그 자리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잔잔한 목소리 톤과 우아한 움직임을 수행했다. 조건부 환대의 방증이었다. 환대가 무엇에 대한 인정이고 존중인지 놓친 것이다.

품에서 인터뷰와 정리를 하고(추가) 동북권npo지원센터에서 발행한 기록집 <품을 품은 사람들>을 보면 여러 참여자가 비슷한 얘기를 한다. “품은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줬어.”, “판단이나 평가 없이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줬어.”, “그렇게 매일 가서 라면만 먹고 오는데도 선생님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질문과 응원, 지지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흘러가는 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환영과 환대는 다르다. 환대의 기본 단위는 오롯이 한 개인이다. 그의 위치, 말, 태도와 상관없이, 무기력한 대로, 다혈질인 대로, 회의적인 대로,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환대의 대상은 집단이 될 수 없다. 성격 별로, 취향 별로 그룹화해서 공식처럼 대할 수도 없다. 환대가 학교에서, 학원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이자, 문화예술교육에서 중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대부분 프로그램, 프로젝트에는 목표가 있다. 사업 주최에서 요구하는 성과 기준이 있다. 변화와 성장이라는 지표성이 과정 안에 수반되어야 한다.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발전의 서사가 보이지 않으면 다음 기회란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 교사와 기획자가 만나는 이들 한 명, 한 명을 마음으로는 아끼면서도 능동적인 수행자를 간절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피지 못하는 환대는 저 끝까지 이어진다. 다양한 이들은 인정의 기준에 맞춰 몸을 구긴다.

초창기 시절, 품은 청소년들을 만나러 전국 구석구석을 다녔다. 강북에 자리를 잡은 후로는, 구석구석의 청소년들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각양각색의 청소년들을 모조리 품으려 했다. 하지만 함께 가려 갈수록, 공동의 약속이 흔들거렸다. 환대가 아슬아슬했다. 결국, 품은 긴 고민과 논의를 통해 결정 내렸다. “자기 동기와 의지로 오는 청소년들과 함께한다. 그 청소년에게 끌려온 아이들까지만 함께 간다.” 지금의 품은 자리를 열 때 최대 이십 명, 웬만하면 다섯 명에서 열 명 사이를 고집한다. 개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기획하는 곳곳마다 빈자리를 꼭 남겨둔다. 머뭇거리는 이에게 한두 자리의 공석은 초대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무 잘 짜면 안 되는 거야.”

가령 숨에서 진행하는(추가) ‘십만 원 프로젝트’는 청소년이 하고 싶은 작업을 스스로 하는 프로젝트이다. 십만 원부터 시작해 매해 십만 원씩 프로젝트 지원금이 올라간다. 연장 지원 최대 오 년. 이제 삼 년 차이지만, 품은 오십 만원을 지원할 상상만으로도 미소가 가득하다. ‘십만 원 프로젝트’에는 품의 활동가 전원이 참여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는 조언자가 아닌, 질문하고 고민을 나누며 힘을 실어주는 환대자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참여자들은 자신만의 사유를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삶과 스타일을 담아낸다. 오르내리는 감정에 대해 단편 영화를 찍고, 자해를 성찰하며 인권에 대한 사유를 내리는 등, 열 개가 넘는 프로젝트 속에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동북사구 활동가들과 진행한 ‘여행학교 숨’ 또한 마찬가지이다. “첫 모임을 수다 자리로 준비했을 뿐이야.” 이것이 말처럼 쉬울까. 모인 이들이 멈출 줄 모르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다. 약속된 시간은 끝나가지만 그럴듯한 여행계획안은 나오지 않는다. 기획자로서는 아찔한 순간이지 않을까. 하지만 “빈 계획표가 불안하다”는 나를 의아해한다.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 궁금하지 않아?” 묻는다. 품(숨)은 집요한 과정 설계를 경계한다. 촘촘한 설계 뒤에 기획자의 불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불안은 시간과 과정에 대한 권력을 쥐게 한다. 참여자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품(숨) 역시 기획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그렇기에 self-so(스스로 그러한 태도)를 좌우명처럼 입에 달게 된 것은, 어쩌면 자기 실천을 위한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기획 단계에서 치열하고 처절하게 논의했던 것은, 이토록 실행 과정을 비워놓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코로나19 속에서도 ‘여행학교 숨’은 기어코 또 다른 채비를 할 수 있던 것 아닐까. ‘결혼 후 떠나는 첫 시베리아 횡단기(2019)’ 같은 실로 낭만적인 여행은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만남의 본질은 서사이다.>

작년, 갑작스럽게 생겨난 코로나19바이러스는 일상을 정지시켰다. 수많은 공간이 버티다 못해 문을 닫았고 문화예술공간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마을배움터(숨)은 어땠을까. 홈페이지에는 ‘배움터 운영 중단’이라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별의별짓’ 소식은 여전히 공유되었고 내용 또한 풍성했다. 유튜브 채널에는 양질의 강의와 포럼, 청소년들의 영상이 자주 업로드 되었다. 팬더믹 상황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품은 어떻게 대안을 찾은 걸까?

마을배움터(숨) 곳곳을 소개해주던 활동가가 말했다. “잠시 버티면 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어요.” 품(숨) 역시 온라인 만남이 기괴하고 우울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잠시 중단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확진자 수는 점점 늘었고, 올해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계속되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못 정하고 있을 때 품(숨)을 흔든 건, 불현듯 돌아온 ‘판’(별칭)이었다. 판은 청소년 시절 품을 만났다가 예술 공부를 하러 유학 간 친구였다. 외국에서 돌아와 한동안 방송국 피디를 했더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을 보내다가 막 프리랜서로 전향했다고 했다.

“우리가 디지털을 거부해도 그 혜택은 다 누리고 있거든.”

판은 품(숨)의 활동가들을 모아 ‘뉴노멀’에 대해 전했다. ‘디지털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할 수 있는 도구이다’, ‘줌은 십오 년 전 할리우드 영화 속 회의 매체로 빈번하게 등장했다’, ‘모든 만남이 온택트여야 하는 극단적 상황은 괴롭지만, 우리는 이미 하루의 절반 이상을 온라인에서 살고 있다’… 그가 건네는 이야기는 강렬했다. 과학에 대한 터부시와 기술에 대한 불편함을 다시 사유하게 했다. 품(숨)은 장비를 샀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판과 함께 첫 번째 비대면 포럼 ‘교육에 묻는다’를 시도했다.

“현장에서는 아날로그 방식 그대로 진행하면서 송출만 디지털로 해봤는데, 대면이랑은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

포럼 중간중간 실시간 소통이 이뤄졌다. 영등포에서, 제주도에서 질문이 건너왔다. 장소 제약은 문지방만큼 낮았고 그마저도 아카이빙이 해소해주었다. 나 역시 방송이 끝난 한참 후에 포럼을 시청했다. 디지털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해 접속이 가능하면서도, 공유와 동시에 기록이 이루어졌다. 이후로 품은 축제 ‘십대판’에 이르기까지 29년 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만남을 실험하고 시도하며 ‘비대면 만남을 준비할 때 꼭 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발견해갔다.

“디지털이라고 해서 마냥 편할 수 없어.”

우리 사회는 갑작스럽게 만남의 전환기를 맞았다. 기술은 곧 생존이었다. 너도나도 “어떻게 하는 거야?”를 물으며 작은 팁 하나라도 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 화상 채팅은 최선의 대안이었다. 처음에는 영 어색했다. 모니터와 인사하자니 몸이 굳었다. 하지만 한 번, 두 번, 손가락 까딱 만으로 만나고 보고 들을 수 있는 현실이 점점 편해졌다. 앞으로도 회의정도는 디지털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화예술현장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예술가들은 현장성이 사라진 자리에도 감각은 살아있기를 바라며 A부터 Z, 그 이상의 품을 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감응이 일어나고 있는지, 마음이 닿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면 사회가 될 때까지 버텨야 하는 것인지, 본격적으로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심한기 샘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전환의 시대를 건너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서사야. 황금비율의 핵심은 스토리야.” 그동안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쌓기 위해 무엇을 했었나. 비대면 이전의 시간을 돌아본다. 만나는 이들을 살뜰히 챙겼던가. 필요하다면 전화도 하고 메일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던가. 기획의 이유는 끊임없이 물었던가. 왜 이 시간을 꾸리고 만남을 이어가는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던가.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 않았다면, 혹 만남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던가. “기술은 도구이고 매체야. 목표가 되면 그 안에 갇히고 마는 거야.” 비대면이라고 해서 만남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샘은 말한다. 황금 비율도 마찬가지이다. “때에 따라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가져오기도 하고, 반대로 디지털을 아날로그화 할 수 있어야 해. 필요하다면 아날로그만을 고집해야 하고, 디지털로만으로도 갈 수 있어야 하지.” 그렇기에 황금비율이란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 모인 이와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만남의 그릇이다. 서사가 쌓이고 스토리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품은 자신들의 황금 비율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비대면 시대가 무섭지 않다고 전한다.

 

<공공의 아카이빙을 넘어 정책을 바라본다.>

지난달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일상이 복구될 수 있다’는 전망과 ‘디지털 시대가 적극적으로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대결을 벌인다. 곳곳마다 미래에서 보내는 신호를 잡기 위해 촉을 세운다. ‘무엇을 쫓을 것인가.’ 불과 일 년 사이, 바이러스에게 쫓기던 우리는 바이러스가 갈아 놓는 세상을 쫓아 또다시 달음박질 중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모을 때야. 담론을 만들어야 해.”

지금껏 문화예술인들은 정체성 인정으로, 아티스트 페이로, 계약조건과 복지이슈로 나름의 투쟁을 해왔다. 때마다 사업 담당자에게 호소하기도, 작은 테이블로 모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정책을 흔들 만큼 두텁지도, 다듬어지지도, 지속되지도 않았다. 아니, 그러기 어려웠다. 바쁘기도 했거니와, 좌절이라면 숱하게 겪은 터였다. 행정은 성난 목소리를 그저 조각난 민원으로 처리할 뿐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자 문화예술계가 와르르 무너졌다. 시스템의 붕괴였다. 국가는 서둘러 생계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네 번째 지급을 준비 중이다. 방역이 안정화될 때까지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바이러스가 종식되면 무너진 시스템부터 재점검 할 게다. 정책 재설정을 위해 속도를 낼 게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놓칠 것 같아.” 현실을 쫓고 정책을 쫓다가 정말 중요한 건 잃을 것 같다고, 심한기 샘이 다급하게 말한다. 최대한 여럿이, 최대한 긴 호흡으로 현장의 언어를 모아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우선은 이 시기에 ‘문화’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 ’문화와 예술‘이 왜 합쳐져서 쓰이고 있는지부터 다시 묻고 정리할 거야.”

샘에게 담론이란 ‘경험과 이론을 근거로 한 시대의 필요한 것들을 내세우는 목소리’이다. 지금껏 담론은 연구자와 교수들이 형성해왔다. 자연히 경험보다는 이론에 비중이 실렸다. 문제는 언어의 차이였다. 경험과 이론의 언어 차이는 형용사와 명사만큼 컸다. 자잘하고 소중한 이야기는 도표 속에 정리되면서 잘려 나갔다. 지지고 볶는 세월은 현장의 것인데 마침표는 다른 이가 찍는 셈이었다. 그 억울함이 정책에 깃들 리 만무했다. 그래서 품은 현장의 담론을 만들어갈 작정이다. ‘왜’를 집요하게 파고들 심산이다. 그래야 시대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기점에서 ‘우리가 지금껏 무엇을 했는지, 왜 했고, 어떻게 했는지’를 정리하고 돌아볼 수 있을 터다. 시대적 변화와 요구 속에서 본질을 점검해야 다음 방향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으로 내밀 수 있는 언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동북사구의 활동가들이 모여 ‘담론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공부하고 있다. 전국의 ‘마을, 문화예술, 교육’ 키워드의 활동가들을 모으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현장과 함께 언어를 구축해갈 연구자들을 물색하고 있다.

 

전환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자기 기록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환대를 지나 기획 권력과 개별성으로, 담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자기 기록으로 회귀했다. “전환은 이전 것을 고민하며 다음을 제대로 연결하는 것이야.” 이전 것을 고민하려면 자기 기록을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기록이 유의미하려면 스스럼없는 질문과 정직한 성찰이 담겨야 한다. 그것을 준거로 다음을 이어가야 새로움 속에서 쓸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취할 것과 버릴 것, 시도할 것과 타협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작업실에 돌아와 작업 일기 파일을 만들었다. 시작이 반이라지만 새 습관들이기가 만만하지 않다. 그래도 심한기 샘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얘기하신 ‘공공의 아카이빙’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해마다, 이슈마다 변하는 활동의 겉모습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의 서사에 가깝다. ‘현실과 지향 사이의 비루한 고백, 자잘하지만 절절한 자기 의심, 그럼에도 계속해가는 별것 아닌 이유들’의 들쭉날쭉한 서사. “객관적이기만 하면 피곤하고 주관적이기만 하면 헛헛하다”는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보이는 기록과 보이지 않는 기록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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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플러스마이너스1도씨)

서울시동북권역(추가)마을배움터 숨에 다다르니, 마당으로 마중 나온 품(숨) 활동가들이 보였어요. 강아지 무결이도 함께요. 작은 간판에는 우리 팀원 이름이 한 명, 한 명 손그림과 함께 적혀있는데,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봄 햇살을 따라 공간 한곳, 한곳 소개해주고 정성스러운 커피를 내려주셔서 감사해요. 깊고 맛있는 진~한 수다 나누다 갑니다.